※ 이 글은 심리학자인 러시아 팬이 작성한 리뷰의 번역본입니다. (Thanks to kseniyagreen for writing such a wonderful review.)

 

이 글에서는 두 주인공의 이미지와 심리, 놀라운 상호 작용에 대해 좀 더 디테일하게 고찰해볼 것이다. 이들의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케미는 드라마 초반부터 느껴졌고, 드라마를 다 본 시청자들은 이들의 브로맨스가 다른 어떤 러브 스토리보다 더 빛난다고 평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두 뛰어난 배우의 파워풀한 조합 덕이 컸다. 그러나 강렬한 관계의 전제 조건은 대본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괴물'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동식과 주원은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일단은 그들을 따로따로 살펴보자.
 

이동식 - 잃어버린 낙원에 대하여

 

우리는 첫 회에 이미 이동식의 비극적인 스토리를 알게 된다. 밝고 대담했던 청년의 삶은 스무 살에 무너져내렸고, 그 후 20년은 모두 상실과 고통의 연대기이다. 마치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마다 또 다른 충격이 그에게 닥치는 것 같다. 

비극 이전의 이동식은 어떤 사람이었나? 많은 장면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려내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가 멋진 반항아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누군가의 틀에 맞추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며 약자를 보호했고, 비록 장르는 달라도 그의 여동생처럼 음악을 사랑했다. 계속해서 상처를 주는 비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동생과 매우 따뜻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이는 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전반적으로 명랑하고 대담하지만 친절한 사람이 그려진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게는 이 청년의 무언가가 남아 있다. 비록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이는 파괴의 과정이 이미 진행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동식은 동료들 사이에서 '또라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동식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이상함을 드러낸다. 반쯤 미친 미소는 그의 깃발이고, 삶의 노골적인 불의에 저항하는 고요한 시위다.

 

동식의 가족 이야기가 성당에서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장면 전체가 모든 의미에서 조화롭고 풍요로운 삶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연이 연주하는 노래, 엄마와 엄마 친구의 대화에서 '불의', '공평'이라는 단어가 이미 들린다. 그런 가정에서 자란 동식에게 정의감은 당연했던 것 같다. 그러나 괴물 같은 대재앙이 덮치고, 그의 조화롭던 세계는 하루 만에 무너져내린다.

 

유연의 손가락은 그녀의 집 마당에 있는 두 천사상 사이에서 발견된다. 주원은 동식이 마당에 있는 장식품들을 치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었다. 왜 저렇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남겨두는 걸까? 동식이 살인마라서 트로피로 간직한 걸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주원의 결론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는 동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매우 예리하게 파악했다.

 

동식은 과거를 뒤로 할 수 있었고, 그럴만한 배짱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집중된 곳에 남았다. 동식이 대부분의 시간을 지하실에서 보내는 것을 보면서 그가 이 집에 살고 있다기보다는 마치 사찰 경비원처럼 초소에서 근무하며 집을 지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부분적으로 그는 희망을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맞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유연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일부는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한 사람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범죄가 처벌받지 않은 채로 남고, 모두가, 동식을 제외한 모두가 오래전에 이를 받아들인 것 같다는 사실 말이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남상배와 나눈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식은 한때 법을 믿었다. 경찰이 되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한동안 그를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곧 법이 종종 이 천사상들처럼 침묵하는 목격자이고,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천사'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이렇게 시작됐다. "괴물 같은 새끼들 잡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그러나 이 생각은 동식의 본질과 모순되기 때문에 그의 내면을 파괴한다.

 

하지만 20년 동안의 고독한 투쟁 끝에 동식은 이미 극도로 지쳐 있었다. 우리는 사소한 부분들에서 그가 지쳐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연의 실종 현수막이 떨어져 있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이 투쟁은 이제 거의 형식적인 것이 되었고, 절망이 서서히 그의 영혼을 잠식했다. 그리고 주원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절망은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을지도 모른다.

 

 

한주원 -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아이

 

동식의 어린 시절이 잃어버린 낙원이라면, 주원의 어린 시절은 아마 처음부터 악몽이었을 것이다. 한쪽엔 냉정하고 잔인한 나르시시스트 아버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자신의 절망을 감추지 않는 우울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술에 취했고,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웠고, 그것을 알리고자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남편의 경멸과 짜증을 점점 더 돋울 뿐이었다. 그녀의 고통은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들은 언제나 느낀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그것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어린 주원을 보면, 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벌어진 무서운 일을 보면서 끼어들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는 토끼 인형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지지대인양 끌어안고 마치 마비된 것처럼 서 있는다. 그리고 이 장면은 정말로 무섭다. 사실 이 장면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를 죽였다. "하는 게 문젠가, 실패하는 게 문제지.", "주원이 인생에서 당신은 힘이 아니라 짐이야." 여기서 아버지는 어머니의 다음 시도가 죽음으로 끝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왜 주원은 내려와서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을까? 그녀가 그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에 화가 나서? 나는 이게 유일한 포인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한 장면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체 상황은 그가 참여하기엔 너무나 괴물 같은 것이었다. 이는 나중에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 주원의 성격 확립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자신만의 추상적인 이상 세계에서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강박적인 욕망이다.
 
또한, 그는 어떤 의미에선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괴물'에서는 흥미롭게도 장면의 유사성이 때때로 운명의 대조를 드러낸다. 두 어머니의 손바닥이 보이는 장면에서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다른지 보라. 동식이 체포되는 장면에서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를 구하고 싶어서 손을 뻗는다. 낯선 사람들이 주원의 어머니를 데려가는 장면에서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며 손을 뻗는다. 즉, 이 장면에서 아들과 어머니의 역할이 뒤바뀐다. 그 손길은 너무나 무거웠고, 이는 주원이 내려오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부모의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는, 7살 아이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임. 주원이 언젠가 동식에게 하게 되는, "살아있는 게 짐덩이인 인간 있잖아요."라는 말은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었다. 주원은 다른 사람과의 감정적 연결이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잡지 못한 손은 주원의 개인적인 악몽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상실을 슬퍼했다. 비록 그 상실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경멸적인 말을 하면서 아이에게서 슬픔을 깨닫고 애도할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주원은 이후 20년간 이 계단에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드라마가 시작할 때 우리가 본 그의 모습이다. 청결과 질서를 중요시하면서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어떠한 접촉도 피하는 모습 말이다.

 

그러나 주원이 어떤 갑옷을 두르고 있더라도, 영혼만큼은 그의 안에 살아 있었다. 이것은 고통을 볼 때 그의 시선이 변하는 방식,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감정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은근하게 드러난다. 그는 강민정에게 수갑을 채워두는 것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고, 동식과 길 잃은 소년을 위해 직접 우비를 사러 간다. 이렇듯 주원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작은 순간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런 심리적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주원의 경우 감정과 의식이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모자의 정 같은 걸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표정이 바뀐다. 그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 그녀가 자신을 버린 것처럼 말한다. 동식은 마음속으로는 여동생이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와 마주치는 환상을 가졌다. 어머니는 그저 자신을 떠난 거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마도 주원이 가진 환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모든 감정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지하실에 안전하게 봉인되었다.
 
 
이것이 드라마 초반에 우리가 본 그들의 상태다. 한 명은 거의 인생 밑바닥에 있고, 다른 한 명은 정상 근처에 있다. 그러나 둘은 똑같이 외롭고, 망가졌고,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의 삶에 트라우마가 된 사건은 그저 상처를 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타고난 '사랑꾼'인 동식의 삶은 거의 실망으로 가득 찼다. 그의 집처럼 넓고, 따뜻하고, 살아있는 목소리들로 채워졌어야 했던 그의 내면세계는 텅 비고, 유령이 나올 것만 같은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주원은 타고난 구원자다.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를 보호하는 건 주원에겐 본능을 따르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역할은 그에게 재앙이 되었지만, 주원은 그걸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 동식의 삶이 형식적으로 바뀐 것처럼 주원의 사명감도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두 주인공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을 괴물처럼 느낀다. 둘 다 본인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점차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혼자 힘만으로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들어주고 지켜봐 줄 가까운 누군가가 필요하다.

 

 

Han Juwon and Lee Dongsik: In search of the lost. Part 1 (of 2)

(Spoilers, a lot)  In this article, I will dwell in more detail on the images of the two main characters, their psychology and their amazing interaction. The incredible "chemistry" of this tandem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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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원 & 이동식: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서 Part 2)